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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을 종조로 묘법연화경과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의지하는 본 종단은 선암사 경운선사를 은사로 득도하신 태허조사스님께서 창종하시어 산문을 여셨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1055~1101)은 고려 교장(敎藏: 2005년 교육부는 일제시대 잘못 오역된 속장경(續藏經)을 교장으로 정식 교과서를 교정함)을 간행하시고 묘법연화경을 한국에 뿌리 내리게 하신 대한불교관음종의 종조(宗祖)이시다. 훗날 종조 대각국사의 뿌리는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仙庵寺)의 경운원기(擎雲元奇)(1852~1936) 선사께 이어지고 관음종 개산조 태허홍선(太虛弘宣) 조사스님께로 그 법맥(法脈)이 이어진다. 조사스님께서는 화엄경(華嚴經)의 기조 위에 묘법연화경(법화경:法華經)을 꽃피울 때 우리는 모두 부처(일불승:一佛乘)가 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종도들을 이끌어 주셨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


대각국사 의천의 탄생과 출가

호는 우세(祐世), 이름은 후(煦), 자는 의천(義天), 문종(고려11대 왕)의 넷째 아들로 선종의 동생이시다.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이다. 1055(문종9)년 9월 28일 탄생. 대각국사는 그의 시호다.
부왕은 네 왕자를 불러놓고 “누가 능히 출가하여 복전(福田)의 이익을 짓겠는냐”고 물었다. 이에 국사는 출가를 결심하여 1065년(문종19) 5월 14일 당시 왕사였던 난원 (爛圓: 훗날 景德王師)에 의해 내전에서 머리를 깎게 하고, 개경의 영통사(靈通寺)에서 살게 되었다. 난원은 화엄종에 속한 66세의 노승이었고, 국사는 이해 10월 불일사 계단(戒壇)에서 계를 받았고, 난원은 그 다음해 입적했다.
국사는 어린나이였지만 학문을 쉬지 않았고 13세인 1065년(문종21)때 왕은 우세(祐世)라는 호를 하사하고 승통(僧統)직을 내렸다. 19세에 세자를 대신해서 교장(敎藏)의 수집발원의 글을 지었다.
국사가 20세 이전에 이미 교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수집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불교학에 대한 남다른 안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23세 때부터 강의를 했는데 이로부터 입적할 때까지 24년 동안 한번도 폐한 적이 없었다

구법 행적 (화엄과 천태사상 수학)

국사는 34살 되던 1084년(선종1) 정월에 내전에 들어가 송나라로 가서 구법 할 뜻을 간곡히 아뢰었으나 허락 받지 못했다.
둘째형인 선종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했지만 모두 반대했다. 이에 국사는 중신들 앞에서 현장의 서역구법과 의상의 입당구법의 예를 들면서 눈물로 호소했지만, 왕자의 입송(入宋)이 요나라를 자극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염려하는 중신들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국사의 구도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듬해 4월 8일 밤 왕과 태후에게 편지만 남긴 채 제자 수개(壽介)등과 함께 정주(貞州:오늘의 김포)에서 상선을 타고 송나라로 향했다. 국사는 5월 초 판교진에 도착했고. 7월에는 송의 서울 변경(汴京)에 이르렀다.
송제(宋帝) 철종(哲宗)은 국사를 따뜻이 맞아 주었고, 여러 가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송에 체류하던 14개월의 짧은 기간에 변경(汴京)과 항주(杭州)를 오가면서 고승 50여 명을 만나 불법을 묻거나 교류했다. 국사가 직접 만났거나 서신으로 교유했던 송나라의 승려 중에 소속 종파의 확인이 가능한 경우만을 분류해 보면 아래와 같다.

<국사의 14개월 송나라 구도 행각>

사찰
승려
기타
상부사
주지 정원(淨源)
반년동안 항주상부사에서 수학
혜인사(慧咽寺)
상부사 정원스님과 함께 이동
화염종의 중흥도량으로 발전.
훗날 국사와 인연으로 고려사(高麗寺)로 이름이 바뀜
화엄교장설치, 교장 7,500권비치
국사가 금 2천 냥을 보내 경비를 지원함
국사의 소상(塑像)이 봉안됨
계성사(啓聖寺)
유성법사

상국사(相國寺)
종본선사
국사 찬양게송 남김
향주상천축사
종간(從諫:?~1108)은 국사에게
수로(手爐)와 여의(如意)를 주며
홍법전등(弘法傳燈)을 부촉함.
종간외 8명 스님 친견
국사에게 가장큰 영향을 준 스님이 종간스님

송본(宋本), 요원(了元), 회련(懷璉) 등 5명
선(禪)을 수학
상국사(相國寺)
원조(元照), 택기(擇基) 등 3명
율과 정토 수학
종단미상
12명
송나라 스님들과의 만남

<종본선사의 국사 찬양게송>


이 세상 그 누가 만 리의 높은 파도 타고, 불법 위해 몸 잊고 선재를 본받았던가?
생각건대 염부제에서는 참으로 희유한 일, 마치 우담발화꽃이 불 속에서 핀 것 같네.


14개월 동안 송나라 구법을 통해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고 「화엄대부사의론(華嚴大不思議論)」등 제종(諸宗; 여러 종파)의 교장 3천여 권을 3,000여 권의 불전을 구해 고려로 귀국하였다.

국내에 귀국하신 국사의 행적

년도행적의미
1084년(선종1)흥왕사 주지 소임
고려 최대 사찰의 주지
1089년(선종6) 10월흥왕사 주지 소임
법화경(法華經)도량 건립
1090년(선종7)「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摠錄)간행

1091년(선종8)일서(佚書)4,000여 권 구함

1092년(선종9)모후인 인예태후 입적
국사의 나이 38세
1094년(선종11)태왕 선종의 입적
국사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
천태종 개창을 반대한
법상종 세력의 비판에 직면.
1095년(숙종1)해인사로 물러나심

1096년(숙종2)숙종의 부름으로 흥왕사에 주석

1097년(숙종3)숙종 4자 징엄(澄儼)을 국사에게 출가시킴

1100년(숙종5)국청사에서 「법화현의(法華玄義) 강

1101년(숙종6) 8월국사의 병 위독
숙종왕 친히 위문
1101년(숙종6) 10월5일
법랍 36세로 입적. 시호를 대각국사(大覺國師)라 함
세수 47세 입적

국사의 고려 교장(敎藏: 2005년 교육부는 일제시대 잘못 오역된 속장경(續藏經)을 교장으로 정식 교과서를 교정함) 간행의 빛나는 업적

1090년(선종7)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에서 4천여 권의 장소를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를 모아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고, 그 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摠錄)」3권을 편집했는데, 각 권의 안쪽에 해동유본 현행록(海東有本 現行錄)이라 했다.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해 모두 1,010부 4,740권의 장소를 간행했는데, 이것을 고려 교장(高麗 敎藏)이라 한다.
그 뒤 선암사(仙岩寺)와 홍원사(洪圓寺)를 거쳐 해인사에 머물고 있다가 숙종이 즉위하여 간청하자 다시 흥왕사에 돌아와 강의를 했다.
1097년(숙종2) 2월 태후의 발원으로 국청사(國淸寺)가 낙성되자 그 해 5월 그가 제1세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했다.
그의 강의를 들으려고 모여드는 학자가 무려 1천 명을 넘었다. 이로서 고려에 묘법연화경과 천태사상이 그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저술


「대세자집교장발원소(代世子集敎藏發願疏)」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摠錄)」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 「팔사경직석(八師經直釋)」 「소재경직석(消災經直釋)」
「기일본국제법사구집교장소(寄日本國諸法師求集敎藏疏)」,「신편제종교장총록서(新編諸宗敎藏總錄序)」,
「대선왕제종교장조인소(代宣王諸宗敎藏彫印疏)」등 10여 부 300여 권이 된다고 한다.
현존하는 것은「신편제종교장총록」과「대각국사 문집」「신집원종문류」「석원사림」등이 있고, 「간정성유식론단과」의 서문이 있다.

경운원기(擎雲元奇 1852~1936)선사


행장

1852년 1월 3일 경남 웅천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 석옹(石翁)이라는 호도 사용했 다. 모친은 구씨(具氏)였다. 17세에 구례 연곡사에서 환월(幻月)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사미계는 해룡(海龍)스님에게, 비구계는 화산(華山)스님에게 받았다. 순천 선암사 대승강당 (大乘講堂)에서 경붕(景鵬)스님에게 교학을 배웠으며 30세 되던 해에 강석(講席)을 승계했다. 그 후 후학 양성에 전력을 다해 근세 대강백(大講伯)으로 명성을 떨쳤다. 스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학승들이 선암사 대승암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경운스님은 순천에 포교당을 건립한데 이어, 1910년에는 경성에 중앙포교당이 설립되자 교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세속으로 들어가 중생들을 제도하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삶을 몸소 보 였다. 1911년 1월 15일 만해, 석전스님 등이 일제에 맞서 조선불교임제종(朝鮮佛敎臨濟宗)을 만들 때 임시관장으로 추대될 만큼 존경을 받았다. 당시 임제종은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 고 임시 종무소를 설치했다.
스님은 1917년 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朝鮮佛敎禪敎兩宗敎務院)창립 당시 교정(敎正)으로 추대 됐다. 이 같은 사실들은 스님이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의 정신적 중심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운스님은 말년에 “병들고 늙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 되니, 젊어서 공부 하여 중생을 건지라”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


또한 정묘년(丁卯年, 1972년) 9월 20일(음력)에 쓴 편지에서 스님은 제자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내가 모여 바다를 이루고, 티끌이 모여 산을 이루며, 털이 모여 머리를 형성하듯, 우리 부처님은 덕을 쌓아 부처가 될 것이니 털끝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라” 작은 일을 소중히 여기고, 언제나 방심말고 수행정진하여 정각의 경지에 오를 것을 당부 하는 내용이다.
스님은 글씨 또한 명필로 소문이 나서 전국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찍이 29세 때에 명성황후의 뜻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금자 법화경을 사경하기도 하였다.


통도사에서 사경할 때 족제비 꼬리털로 정필(淨筆) 2자루를 만들어 3개월 동안 일자 일배(一字一禮)로 전 14축을 완자(完字)하였다. 또한 46세 되던 해에 선암사 비로암에서 5년동안(1897-1901) 일행삼배(一行三拜)의 금강신(金剛信)으로 80화엄경 전부를 20여권에 나누어서 사경하였다.
경운스님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전국31본산의 주지스님들이 직접 선암사 대승암에 와서 스님의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평생 후학을 기르는데 헌신하던 경운스님은 1936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순천 선암사 대승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85세, 법랍 68세. 현재 선암사에는 스님의 비와 진영, 그리고 화엄경사경 등 많은 유품이 전해진다.

개산조 태허(太虛 1905~1979)조사스님 


조사스님 생애

법명은 홍선(泓宣)이며 태허(太虛)는 법호이다. 전주 이씨로 속명은 이용이(李龍㶊)이다. 1904년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서 아버지 선준(善俊)과 어머니 묘행심(妙行心)을 연(緣)으로 출생하셨다. 어려부서부터 정의감과 기개가 있어 주위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고 자랐으며, 16세인 1919년 경성예비고등전문학교(京城豫備高等專門學校)를 졸업하고 22세인 1925년에 일본 경응대에서 수학하셨다.


그러나 어머니가 별세한 후 세간의 학문으로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 1928년 현 낙산묘각사에 토굴을 조성하셨다. 이듬해 소요산 백운암(白雲庵)에 들어가 1천일동안 안거 정진을 시작하시고 전국의 제방선원을 돌며 수선안거 하셨다. 그리고 29세 때인 1932년 조계산 선암사(仙巖寺)에서 경운(擎雲)원기선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그 후 중국 산시성(山西省)으로 구법을 떠나 여러 명찰을 순례하며 고승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1934년에는 중국 상해에 권투구락부를 개원하여 임시정부연락책을 맡았다. 이후 1936년부터 4년간 불교경전 수행과 연구를 하셨으나 그것만으로는 미진하다는 생각에, 1940년 원불(願佛)인 철불상을 모시고 귀국하여 서울 종로구 숭인동 낙산(駱山)밑에 묘각사(妙覺 寺)를 창건하고 초대주지에 취임하시어 포교에 들어갔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북 상주 모동면으로 자리를 옮겨 백화암(白華庵)을 창건하고, 선정(禪定)을 익히면서도 「법화경(法華經)」을 사경하면서 구도의 길을 걸었다. 6년 동안 상주에 머무르며 공부에 전념한 스님은 1957년에 법화계통(法華系統)을 규합하여 일승불교현정회(一乘佛敎顯正會)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이듬해인 1958년에는 서울로 돌아와 하루도 빠짐없이 종로 파고다공원에 나가 2년간 거리설법을 하셨다. 1960년에는 전국을 순회하며 설법 및 포교를 하시고 입춘 법회와 신곡맞이 법회를 제정하셨다. 이듬해 1961년에는 서울 동양방송에서 라디오로 신앙강좌를 하시기도 했다.


1965년 12월 8일에는 대한불교관음조의 전신인 대한불교불입종(大韓佛敎佛入宗)을 창종하고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셨다. 또 1970년에는 한일불교친선교류회(韓日佛敎親善交流會) 고문으로 추대됐고, 1971년에는 정부로부터 보국훈장(保國勳章)을 받았고, 전일본 불교회(全日本佛敎會)의 초청으로 일본 불교계를 시찰했다.


청소년 포교의 중요성을 느낀 스님은 1973년 마하연불교학생회를 창립했고, 불교잡지 「범성(梵聲)」을 창간했다. 1975년 한중불교협의회(韓中佛敎協議會) 고문, 1976년 국가총력안보협의회(國家總力安保協議會) 불교대표로 추진됐으며, 같은 해 묘각사 대웅전을 중창 했다. 또한 고희(古稀)를 넘긴 73세의 나이에도 「법화경」홍보에 힘을 써, 낙산묘각사 100일 안거동안 「법화경(法華經)」 전7권을 사경하여 법보(法寶)로 모시기도 했다. 이렇게 온 국민에게 법화사상(法華思想)의 포교와 불입종의 발전에 힘쓰던 스님은 1979년 6월 24일 세수 76세, 법랍 48세로 묘각사에서 입적했다.  

5일간의 종단장(宗團葬)이 끝난 후 다비를 하니 1백28과의 사리가 수습되어 스님의 법력을 나타냈고, 이는 묘각사 경내 사리탑에 봉안됐다.  

스님의 가르침은 대한불교관음종에서 법맥을 잇고 있다. 저서로는 「해동천태법화맥소고」, 「피안의 등대」, 「법화문증선집」, 「법요의식집」, 「믿음의 생활신조」, 「인생탈춤」 등 외 여러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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